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몽골-타타르의 멍에 (문단 편집) === 문화 분야 === >타타르의 침입은 민족적 재난이자 국가적 파국이었다. 동시대인의 표현대로 타타르의 침입은 '러시아 땅의 파멸'이었다. '이방인의 징벌.'“잔인한 민족이 우리를 덮쳐 하느님을 모욕하고 우리의 땅을 황폐화했다.”이러한 괴멸과 파괴를 묘사하는 데 표현을 부드럽게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러시아 문화의 역사에서 타타르의 멍에는 시대의 경계를 이루지는 않는다. 노동이 중단되거나 창조적인 기분 또는 열정이 꺾이는 일은 관찰되지 않는다. 문화가 북쪽으로 이동한 것은 사실이다. 새로운 중심지들이 발전했고 옛 중심지들이 쇠퇴했다. 그러나 이미 이전에 형성된 것들이 성장한 것이지, 얼마 전까지도 역사학자들이 말하기 좋아했던 대로 남쪽의 키예프 문화가 절반은 야만적인 북동쪽으로 이동한 것은 아니었다. 북부는 오래전부터 이미 야만적인 처녀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수즈달 땅은 결코 벽지가 아니었다. 반대로 수즈달 땅은 교차로에 놓여 있었다. 어쨌든 13세기 러시아 문화의 역사에서 쇠퇴의 시기는 없었다(이스트린을 참조하라). 13세기야말로 연대기의 발달은 물론 키예프 동굴 수도원 '파테리크', 주석이 달린 '팔레야', 그리고 반유대적인 논쟁을 담은 일련의 총서들을 비롯한 의미심장한 사상적·문화적 성과가 있었던 시기였다. 13세기의 기념비적 문헌들에는 남쪽의 슬라브 문화, 달마티아 연안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이 감지된다. 14세기에 이런 관계들은 더 강화되고 증가한다. 이런 현상을 새로운 남슬라브 영향의 유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팔라이올로고스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비잔틴의 새로운 문화 운동을 직접 계승한 것이었다. >---- > 게오르기 플로롭스키, 러시아 신학의 길 키예프 루스가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높은 문화적 수준이 몽골의 침공으로 단절되었다는 것은 편견에 가깝다. 오히려 키예프 루스의 문화 수준은 모스크바 대공국에 비해 떨어졌고 그마저도 일부 지배계층에 국한되었고 국가 자체는 슬라브 다신교적 성향이 훨씬 강했다. 동로마로부터 전수된 기독교 문화라는 측면에서 볼때, 이후의 [[모스크바 대공국]], [[노브고로드 공국]]은 키예프 루스보다 문화적, 예술적으로 진보된 사회였다. 단순히 동로마를 모방한 것을 넘어 그것들을 토양으로 러시아만의 독자적인 예술 사조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대표적인 예가 [[안드레이 루블료프]]. 물론 몽골 침공의 충격이 일시적으로 문화적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긴 했다. 그러나 이후 충격에서 회복하면서 대대적인 재부흥을 맞는다. 교회는 몽골로부터 면세특권을 인정받았고 일반민들은 몽골에게 약탈당하거나 세금으로 내지 않기 위해서 재산을 교회에 바치거나 스스로 교회 소작민이 되었다. 교회의 성장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세계총대주교를 통해 '''동로마의 러시아에 대한 영향 강화'''로 이어졌다.[[https://en.wikipedia.org/wiki/Theophanes_the_Greek|그리스인 테오파네스]] 같은 동로마 예술가, 학자들이 러시아에 대거 유입되었으며 이는 [[https://ko.wikipedia.org/wiki/%EC%95%88%EB%93%9C%EB%A0%88%EC%9D%B4_%EB%A3%A8%EB%B8%94%EB%A3%8C%ED%94%84|안드레이 루블료프]] 같은 러시아인들이 비잔틴 예술에 접목하여 러시아만의 독창적인 새로운 예술 사조를 만들어내는 데 기여했다. 불가리아 총대주교 [[https://en.wikipedia.org/wiki/Euthymius_of_Tarnovo|투르노보의 에피미]]의 제자이자 그리스 아토스 산에서 공부했던 [[https://en.wikipedia.org/wiki/Cyprian,_Metropolitan_of_Kiev|키예프 대주교 키프리안]]은 세계총대주교의 명을 받아 루스 공후들과 주교들 간의 분쟁을 중재했고 그레고리우스 팔라마스의 헤시카즘과 예루살렘 교회 법령, 음악 표기법을 규정하고 전파했다. 바실레이오스 카이사레이아스(Βασίλειος Καισαρείας), 시리아인 이삭(ܡܪܝ ܐܝܣܚܩ ܕܢܝܢܘܐ), 예루살렘의 헤시키우스(Ησύχιος, πρεσβύτερος), 고백자 막시무스(Μάξιμος ὁ Ὁμολογητής), [[수도자]] 필립(Φίλιππος ο Μονότροπος) 등 그리스어 신학, 철학 서적들의 슬라브어 번역본이 만들어졌고 유입되었다. 훗날 루스 차르국 시대의 고위성직자나 귀족들은 아리스토텔레스나 아가페토스 철학을 논하고 공부했는데 이 시기의 영향이다. 일반 사람들의 관습이나 생활 역시 마찬가지다. 올랜도 파이지스는 도모스트로이를 '보야르의 가부장적 관습'의 증거로 든다. 자식들한테는 매를 들고 엄하게 키우라는 내용이 있긴 하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전체적으로 가장에게 폭력을 마지막까지 쓰지 말라는 당대 기준으로 굉장히 진보적인 내용이다. > 죄인인 나(이름)는 외아들(이름), 며느리(이름), 손자들, 같이 사는 사람들[* 원문은 Домочадцы. 당시는 집안에서 가장의 권한이 컸으므로 같이 사는 이들이 친구든, 노예든, 손님이든 가장은 그들에게 접대하고 보호할 뿐만 아니라 필요할 경우 지시할 권리도 있었다. 때문에 일부에서는 하인으로 번역하기도 한다.]을 축복하고 가르치고 훈계한다. 기독교 법칙에 따라 깨끗한 양심과 의로운 생활에 힘쓰며 하느님의 뜻과 그분의 계명을 이행하고 하느님을 부려워하며 올바르게 살고, 아내를 훈육하고 같이 사는 이들에게 강압적으로 굴거나 때리지 말고 힘든 일을 시켜서는 안된다. 오직 어린아이처럼 모든 것이 평온하게 잘 입고 잘 먹게 하고 집을 따뜻하게 하고 항상 질서를 지켜라. >---- > 도모스트로이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내리는 가르침' 中 > 어떠한 일이든 주의깊게 행하고 간교함 없이 성실케 하여 웃음거리를 만들지 않으며 도둑질 하지 않고 어디서든 먹을 것과 마실것들 모드를 필요하다면 덮어서 썩게 하지 않고 곰팡이 피게 하지 않고 시게 하지 않고 여기저기를 쓸고 닦고 물에 젖게 하지 않고 물을 붙지 않고 더럽히지 않고 쓰레기를 만들지 말고 접시를 깨끗히 씻고 잘 정리하고 남은 음식은 주인과 손님을 위한 것으로 구분하고 이미 시작한 것은 주인이 명령하는 대로 각 사람의 위치에 따라 식탁에 올려야 한다. > >모든 일을 잘, 주의 깊게, 간교함 없이 행하고 모든 지시를 수행하는 이는 대접하고 친절한 말로 기쁘게 하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고 그의 모든 요구를 들어줘라. 실수로, 잘 몰라서, 우둔해서 일을 망치면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조심하도록 다른 사람들 앞에서 오직 말로만 그를 가르치고 그 죄를 용서해라. 두번째나 세번째로 일을 망치거나 게을러서 하지 않는다면 잘못과 일을 보고 때려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해 보아라. 선한 이에게는 명예가, 악한 이에게는 처벌을 내린다면 그들 모두에게 배움이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집의 여주인은 집안의 여자들을 돌보며 여기 기록된 대로 주의를 주거나 강요하거나 호의를 배풀거나 처벌해야 한다. >---- > 도모스트로이의 '주인은 어떻게 하인에게 그의 공적에 보상하고 나쁜 것에 처벌하는가' 中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